Writing/Tang Poem 300

013. 送別(송별) /王維

혜공 2015. 2. 10. 14:18

 

송별

 

五言古詩

 

下馬飮君酒 [하마음군주] 말에서 내려 술을 권하며

問君何所之 [문군하소지] 어느곳을 찾아가나 물었더니

君言不得意 [군언부득의] 세상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서

歸臥南山陲 [귀와남산수] 숨어 살려고 남산으로 간다네

但去莫復問 [단거막복문] 그러면 가시게 더 묻지 않으리

白雲無盡時 [백운무진시] 그곳은 언제나 흰 구름 속이니

또 다른 해석


나란히 말을 타고 가는 임을 따라 오다

말에서 내리어서 임과 함께 술마시며

일후에 무엇하실지 물어보게 되었네

세상일 뜻대로는 안되는게 상례일까

임은 힘없이 일안됨을 말하면서

돌아가 남산아래에 그럭저럭 살련다네

물어보아 무엇하리 할 말이 다시없네

어서 임의 뜻대로 남산으로 돌아가소

흰구름 한가히 떠서 끝날 날이 없구나.

 

 

 

 


Wang Wei

 

AT PARTING


I dismount from my horse and I offer you wine,
And I ask you where you are going and why.
And you answer: "I am discontent
And would rest at the foot of the southern mountain.
So give me leave and ask me no questions.
White clouds pass there without end."


 

왕유(王維) 699~759 산시성[山西省] 치현[祁縣].

 

중국 문화사의 황금기에 활동한 유명한 예술가·문인으로 자는 마힐(摩詰). 시·음악·그림으로 표현되는 인문 교육의 귀감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17세기의 화가이자 문인인 동기창(董基昌)은 그의 화론서에서 왕유를 남종화(南宗畵)의 시조로 규정했다. 남종화는 문인 취향의 그림으로서, 피상적인 묘사보다는 개인적인 감정 표현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 나중에 거의 신화적인 존재로까지 추앙받았기 때문에, 진정한 왕유의 모습을 탐지해내기는 어렵다. 왕유는 당대(唐代 : 618~907)에 태어나서 자랐다. 당시 당의 수도 장안(長安)은 부와 안정을 동시에 누린 국제적 도시였다. 왕유는 21세 때 진사(進士)시험에 급제했다. 9세 때부터 이미 문학적 재능을 보였다고 하지만, 진사 급제는 특히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기 때문으로 추정한다. 그는 고위 관직에 올랐지만, 이내 강등되어 산둥성[山東省]의 하찮은 직책에 임용되었다가, 734년에 수도로 소환되어 상서우승(尙書右丞)의 자리에 올랐다. 안녹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켜 756년에 수도 장안을 점령했을 때, 반란군에 사로잡혀 반란군의 수도인 뤄양[洛陽]으로 끌려갔다. 이곳에서 왕유는 억지 벼슬을 받았다. 758년 관군이 장안과 뤄양을 탈환했을 때, 왕유는 반란군에게 사로잡혀 있을 때 황제에 대한 충성을 표현한 시를 썼고, 또 고위 관리인 형이 힘을 써준 덕분에 화를 면할 수 있었다. 말년에 그는 속세에 환멸을 느끼게 되었다. 아내와 어머니의 죽음으로 더욱 슬픔에 빠진 그는 장안 중난산[終南山]의 망천(輞川) 옆에 있는 시골 집에 틀어박혀 불교 연구에 몰두했다. 왕유가 지은 시 가운데 가장 훌륭한 작품으로 꼽히는 것들은 대부분 시골 풍경에서 영감을 받은 것들이다. 왕유의 예술은 당시의 기록과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그의 그림 사본을 바탕으로 하여 이론적으로 복원할 수밖에 없다. 그가 여러 가지 주제로 그림을 그리고 다양한 표현양식을 채택한 것도 명한 사실이나, 산수화를 발달시킨 최초의 사람 중의 하나로 특히 유명하다. 그는 생존시에 설경산수화로 유명했으며, 가장 유명한 작품은 <망천도 輞川圖>라는 화권(畵卷)이다. 이 그림은 없어진 지 오래되었으나, 후에 제작된 많은 모사품으로 대강의 구도는 보존되었다. 기록상 그의 작품에서 발묵(潑墨) 기법이 최초로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의 그림들은 과거의 통과 새로운 것을 함께 받아들였다. 그러나 후세에 성인에 버금가는 지위까지 올라간 것은 그가 화가인 동시에 위대한 시인이었기 때문이다. 중국 명시 선집에 그의 작품은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그는 이백(李白 : 701~762)·두보(杜甫 : 712~770) 등의 유명한 당대 시인들과 함께 서정시 형식을 완성한 시인으로 손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