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ing/Chinese poem

初春禮讚 (초춘예찬) /이익 (李瀷, 1681~1763)

혜공 2015. 4. 2. 08:34

伏枕厭厭歲月催   복침염염세월최

不知花發後庭梅   부지화발후정매

一枝見在遊兒手   일지견재유아수

引得輕蜂入戶來   인득경봉입호래

 

골골하며 누웠자니 세월이 빨리 흘러

뒤뜰의 매화가 피었는지도 몰랐다가

벌 이끌고 문으로 들어오는 아이 손에

들려 있는 꽃가지를 보고서야 알았네 

 


 

  봄이 오나 봅니다. 영영 오지 않을 것처럼 칼바람이 매서워서 남도의 꽃소식조차 이국의 풍경인 양 낯설더니만, 북한산 아래 구기동에도 이제 봄이 오나 봅니다. 며칠 청명한 하늘에 분수 같은 햇살이 쏟아진 뒤로, 삼동(三冬)을 견디며 깊어진 가로수에도 물이 흠뻑 올랐습니다. 양지 녘에 파릇파릇 애기쑥이 돋아나고 산수유와 개나리가 오손도손 피어납니다. 백목련도 점점이 멍울져가고 번역원 마당 앵두나무에도 잎잎이 움이 돋습니다. 봄은 기다림마저 잃어버렸을 때에도 온다는 말이 실감 나는 요즘입니다.

성호 선생은 매화를 유독 사랑하여 수십 편의 연작시를 지었습니다. 매화분을 방에 두고 새색시 대하듯 다정한 눈길로 마주 앉아 새벽을 밝히곤 했습니다. 매화나무 가지 끝에 봄이 찾아오면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던 선생이었습니다. 그런 분이 오랫동안 지병으로 신음하느라 봄이 온 줄 몰랐다가 문득 아이 손에 들려 있는 매화 가지를 보았을 때 얼마나 기쁘고 행복했을까요? 그 봄의 전령사로 인해 고통도 시름도 다 잊었을지 모르겠습니다.

저도 섬진강가 매화마을에서 본 그 날의 환희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재작년 초봄, 삼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 매화들의 눈부신 향연에 초대되어 그 찬란한 움틈과 개화를 지켜본 것만으로도 제 평생 누릴 호사를 다 누렸다는 생각이 듭니다. 활짝 핀 매화의 군무(群舞)도 장관이려니와 봉긋이 앙다문 꽃망울의 자태는 낙수(洛水) 신녀(神女)의 옥구슬*이거나 앙증맞은 아기의 고사리손이라 해도 좋았습니다. 한평생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는 상촌((象村) 선생의 시구처럼, 눈보라 속에서도 인고의 정점을 찍고 나오는 그 숭고한 떨림으로, 매화는 그만큼의 청향을 자아내는 것이라 여겨집니다.

또 하나 제가 좋아하는 봄의 정경은 강변이나 호숫가의 수양버들입니다. 이맘때의 수양버들은 막 새순이 돋아나기 시작하여 연노랑인 듯 연두색인 듯 참으로 오묘한 빛을 띱니다. 그래서 중국의 시인 양거원(楊巨源)과 한유(韓愈)도 바로 이 모습을 가장 아름다운 춘경(春景)으로 꼽은 바 있습니다. 저 또한 초봄이 되면 버들이 있는 강가로 나가 이 황홀경을 오래 만끽하고 돌아옵니다. 천자만홍(千紫萬紅)의 꽃물결과 꽃놀이 인파로 넘실거리는 4월이나 5월의 소란보다, 그리고 뒤이어 폭풍처럼 몰아쳐 올 분분한 낙화가 안겨줄 허무보다, 인적 드문 강가에서 나는 말없이 너를 바라보고 너는 무심히 나를 지켜보다가 어느덧 동무가 되고 위로가 되는 그런 만남이 저는 좋습니다.

바람 따라 흔들리는 듯 보여도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을 지켜낼 줄 아는, 늘 그 자리에서 별 같은 잎새로 휴식과 성찰의 그늘을 드리우는 나무들, 그들과 함께 모여 살기에 그나마 견딜 수 있는 세상입니다. 주말에는 사철 해맑은 웃음꽃을 피우는 아내와 강변으로 나가볼 작정입니다.

 

글쓴이: 이기찬 (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