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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중과 권력 /엘리아스 카네티

혜공 2015. 2. 20. 22:15

 

 

 

 

 

 

책소개

 

노벨문학상 수상자 엘리아스 카네트의 군중과 권력, 인간의 본질에 관한 35년간의 성찰을 담은 저서. '군중이란 무엇인가', '권력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등의 주제에 대하여 신화와 전설을 중심으로 한 원시문화, 세계종교의 원전, 동서고금의 수많은 권력자에 대한 전기와 기록, 환자의 병례에 이르는 방대한 자료를 통해 문학, 종교, 인류학,심리학과 생물학의 영역을 넘나들며 군중의 역학과 권력의 정신분석학을 규명하고 있다.

 

 

저자소개: 엘리아스 카네티

 

1905년 루스추크 (당시는 불가리아였으나, 현재는 러시아)에서 스페인계 유태인 상인 자크 카네티의 아들로 태어났다. 1911년 가족과 함께 영국으로 이주했고, 아버지가 별세한 후 1912년부터는 가족들과 함께 오스트리아, 프랑스, 독일, 스위스 등을 전전하며 여러 도시에서 살았다. 김나지움은 독일에서 마쳤고, 대학은 빈에서 다녔다. 1929년에 화학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1938년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합병된 후 런던으로 망명했다. 나치통치가 끝나고 1960년부터 수많은 문학상을 받았는데, 1981년 스웨덴 한림원은 카네티에게 "폭넓은 시야, 풍부한 이상, 미학적 힘"을 기리며 노벨 문학상을 수여했다. 그는 장편소설 '현혹'(1935)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떨치게 되는데, 특히 "군중의 광기"에 대해 깊이 있는 고민을 보인 작가로 알려졌다. 그는 영국과 스위스를 오가며 살다가, 1994년 취리히에서 숨을 거두었다. 저서로는 '결혼식'(1932), '허영의 희극'(1950), '죽음을 앞둔 사람들'(1964)과 같은 대중심리를 다룬 희곡들이 있고 사회학적인 글쓰기의 성과인 '군중가 권력'(1964)이 있다. 작가 자세히 보기 관심작가 등록

 

 

목차

 

이 글을 읽는 독자에게 ... 5

 

군중 ... 17

무리 ... 123

무리와 종교 ... 171

군중과 역사 ... 223

권력의 내장 ... 269

살아남는 자 ... 301

권력의 요소 ... 379

명령 ... 405

변신 ... 447

권력의 양상 ... 513

지배와 편집증 ... 545

에필로그 ... 613

 

원주 ... 623

참고문헌 ... 633

작가연보 ... 643

옮긴이의 말 ... 646

 

 

출판사 서평

 

1981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이자 20세기 가장 르네상스적 지성 중 한 사람인 엘리아스 카네티(Elias Canetti)35년간의 치밀한 조사와 분석 끝에 1960년 발표한 불후의 고전 {군중과 권력}이 출간됐다. 군중과 권력을 둘러싼 보편적 '인간 조건(la condition humaine)'을 파악하고자 했던 카네티의 문제의식과 그가 제시한 분석의 틀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귀기울일 만한 가치가 있기에, 고전의 재발굴과 재인식이라는 측면에서 의의가 있다 하겠다.

 

지난 여름을 붉게 달구었던 월드컵의 열기는 아직도 우리의 기억에 새롭다. 또 얼마 앞으로 다가온 대선을 앞두고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이 집단적으로 표출되고 있다. 이라크에 대한 미국의 전쟁 위협이 계속되는 가운데, 북한 핵개발을 둘러싸고 한반도의 긴장도 높아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1960년 카네티가 고민하던 당시 상황과 별반 다르지 않다. 파시즘과 냉전, 핵전쟁의 위협은 조금도 사라지지 않았으며, 프로파갠더들의 극성도 여전하다. 모던한 사회든 포스트모던한 사회든 군중과 권력의 상관관계는 아직도 명쾌히 풀리지 않고 있다.

 

군중현상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군중은 어떻게 형성되고 왜 와해되는가? 도대체 군중이란 무엇인가? 군중은 왜 권력자에게 복종하는가? 권력은 어디서 연유하며 어떻게 지배를 계속하는가? 권력자의 죽음의 위협을 어떻게 제어할 것인가? …… 카네티는 이러한 물음들을 해명하는 일을 자신의 평생의 과업으로 삼았다. 그가 이처럼 군중과 권력의 문제에 매달리게 된 것은 그의 삶과 무관하지 않다. ([군중과 권력]은 카네티의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80년대 초 서너 출판사에서 앞다투어 번역되었던 적이 있으나, 20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모두 절판되어 지금은 서점에서 찾아볼 수 없는 실정이다.)

 

엘리아스 카네티의 삶

엘리아스 카네티는 1905년 스페인계 유태인의 후손으로 불가리아에서 태어났다. 영국으로 이주한 여섯 살 때 갑작스럽게 닥친 아버지의 죽음은 그에게 '죽음'에 대한 집착이라는 지우지 못할 트라우마를 남겼다. 홀로 된 어머니를 따라 어린 시절부터 오스트리아, 스위스, 독일 등 여러 나라를 전전한 카네티는 자연스럽게 고대 스페인어와 불가리아어, 영어, 독어, 프랑스어를 일찍부터 접할 수 있었다. 특히 네번째로 배운 독일어는 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히틀러의 유태인 박해를 피해 망명한 1938년부터 1994년 죽을 때까지 50여 년을 영국에서 살았지만 그는 평생 독일어로만 작품을 썼다. 망명작가이자 코스모폴리탄으로서 그의 유일한 모국은 독일어였던 셈이다. 그의 정신적 귀족주의, 엄밀한 도덕성의 요구 등은 영어문화권에 살며 오직 독일어만으로 글을 쓰는 유태인으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에서 비롯했다.

 

빈 대학에서는 화학을 전공, 박사학위까지 받았으나 카네티의 주요 관심은 어디까지나 문학과 철학이었다. 1932년 희곡 결혼, 1935년 소설 현혹을 발표하며 일약 대표적인 독일어권 작가로 떠오른다. 특히 현혹2차 대전 후 토마스 만, 헤르만 브로흐 등으로부터 '시대를 앞선 작품' '우리 안의 군중 위협에 대한 탁월한 은유'로 격찬받았다. 그러나 그는 그 후 20년 이상 오랜 침묵에 들어간다. 그리고 마침내 1960[군중과 권력]을 발표한다.

 

{군중과 권력}은 군중의 본질을 새로운 각도에서 조명함으로써 인간사에 대한 포괄적인 이해의 토대를 마련한 책이다! - 아놀드 토인비 -

 

출간과 동시에 "군중의 본질을 새로운 각도에서 조명함으로써 인간사에 대한 포괄적인 이해의 토대를 마련한 책"(아놀드 토인비), "마르크스와 프로이트를 재조명할 수 있는 관점을 제공해주는 책"(아이리스 머독) 등의 격찬을 받은 {군중과 권력}은 유럽 사상계의 고전으로 자리잡으며, 카네티의 이름을 전 세계에 알렸다. 노벨상을 타는 데 이 작품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군중은 카네티 인생의 진정한 최대 관심사였다. 1910년 핼리 혜성 출현에 따른 종말론적 패닉 현상, 1911년 타이타닉 호 침몰을 듣고 거리로 뛰쳐나와 비통해 하던 인파의 물결, 1차 대전 당시 빈 시민들이 보여준 적개심과 광기, 전후 독일의 인플레이션에 따른 극심한 궁핍과 혼란, 그리고 히틀러, 나치즘, 유태인 학살……. 그가 살았던 20세기 전반기만큼 군중 현상이 역사상 폭발했던 시기도 없었다. 군중이란 무엇인가, 군중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군중을 구성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이 그를 사로잡았다. 1924년 스무 살의 카네티는 평생을 군중 연구에 바치기로 결심한다.

 

구체적인 계기가 되었던 사건으로 카네티는 두 가지를 예시한다. 첫번째는 1924년 국수주의자들에 의한 독일 외상 라테나우 암살 사건에 항의하기 위해 노동자들이 벌인 대규모 시위였다. 그는 이때의 체험을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이 군중은 예전에 내가 보았던 군중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나는 내 피부로 이 군중을 느꼈고, 이 군중의 일부가 된 것처럼 느끼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서 깜짝 놀랐다. 나는 그때까지 군중을 마치 나를 향해 습격해오는 것 같은 위협적인 것으로 생각해왔다. 그런데 이때에는 정반대 현상이 일어나 어떤 저항하기 힘든 힘에 의해 군중 속으로 빨려들어가 나 자신이 군중의 일원이 되어가는 것을 느꼈다. 데모가 끝나 군중이 해산하고 각자 집으로 뿔뿔이 흩어져갈 때, 나는 나 자신이 지금까지보다 가련한 존재가 되고 무언가 귀중한 것을 잃고 만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두번째는 1927년 성난 시민들이 법무성 건물을 불태워버린 빈에서의 체험이었다.

 

"이 일이 일어난 지 이미 반세기가 지났지만 그날의 흥분은 오늘날까지도 나의 뼛속 깊이 남아 있다. 그것은 내 몸으로 직접 체험한 바로 혁명 일보 직전의 군중시위였다. 100여 쪽에 걸쳐서도 그날 내가 본 바를 제대로 묘사하지 못할 것이다. 그 후 나는 바스티유의 폭풍우가 어떻게 일어났는지에 관해서는 한 줄의 책도 읽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나는 군중의 일부가 되었고, 그들 속에 완전히 몰입되었으며, 또 그들이 하는 일에 추호의 저항감도 느끼지 않았다."

 

그는 군중에 관한 연구를 계속해나가던 중, 연구의 한계를 깨닫게 된다. , 군중 연구가 권력에 대한 포괄적이고도 철저한 연구에 의해서 보충될 필요가 있음을 절감한 것이다. "군중과 권력은 서로 극히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어서 둘 중 어느 한편이 결핍되면 나머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이렇게 연구가 확대됨에 따라, 그에 소비되는 시간 역시 현저하게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나치즘의 발호는 그에게 군중과 권력에 대한 가장 무시무시한 예제를 제공해주었다. 그는 가까이에서 사태의 본질을 관찰하기 위해 나치스의 진군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에 가능한 한 오래 머물려 했다. 그러나 유태인에 대한 박해가 점점 거세지자 영국으로 망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후 그는 줄곧 '군중''권력'에 매달렸다.

 

{군중과 권력}은 이처럼 카네티가 35년에 걸쳐 치열하게 연구한 필생의 기록이다. 스포츠 관중에서 정치집회까지, 부시먼족에서 메카 순례까지, 원숭이의 손가락 훈련에서 알코올중독자의 환각까지 카네티는 온갖 군중현상과 권력의 상관관계를 분석한다. 그는 원시부족의 신화에서부터 세계종교들의 원전, 동서고금 권력자들의 전기, 심지어 환자의 병례에 이르기까지 문학, 종교, 인류학, 심리학, 생물학의 영역을 넘나들며 '군중의 물리학' '권력의 정신분석학'을 완성했다.

 

{군중과 권력}을 읽는 몇 가지 관점

{군중과 권력}에 대한 평자들의 일치된 결론은 이것이 '파시즘에 대한 한 보고서'라는 것이다. 실제로 히틀러의 광기와 역사상 유례 없는 유태인 학살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카네티의 주요 관심사 중 하나였다. 어떻게 예술과 철학과 자연을 사랑하는 독일인들이 그처럼 포악한 권력자의 명령에 복종해 그런 끔찍한 만행을 저지를 수 있었을까, 하는 물음은 카네티뿐 아니라 20세기 지식인들의 공통된 문제의식이었다(이에 대한 카네티의 유명한 해석은 [군중과 역사] 장의 '독일과 베르사유' '인플레이션과 군중' 꼭지에 있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은 카네티의 이론을 지나치게 협소하게 한정하는 감이 없지 않다. 그는 나치스 이전에 20세기 전반기 유럽을 뒤흔든 여러 군중체험에서 연구의 모티브를 얻었으며, 연구를 진행해나가면서 인류사 전체, 문명사 전체로 군중과 권력의 장을 확장시켰다. 따라서 그의 연구는 보편적인 인간 조건의 탐구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럴 때에만 그가 인간 역사에 대해 보이는 어느 정도 체념적이고 비관적인 인식이 올바로 이해될 수 있다.

 

여기서는 {군중과 권력}을 이해하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몇 가지 관점을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

 

** 개인으로서의 인간

우선 카네티는 인간을 환경에 적응하며 자기를 보전해가는 수동적인 존재로 보지 않는다. 그는 원시시대 사냥에 의존하던 원시인의 수렵본능을 상기시키며 이렇게 말한다.

 

"인간이 먹이를 구하는 방법은 교활하고 피비린내가 나며 끈덕지다. 수동적인 것은 찾아볼 수 없다. 인간은 온건하게 자신을 방어하는 것이 아니라, 적이 멀리 있다고 감지하자마자 자기의 적들을 공격한다. 그리고 인간의 공격용 무기는 방어용 무기보다 훨씬 발달되어 있다. 인간이 자신을 '보존'하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또한 동시에 자신의 보존을 위해서 불가피한 다른 것들을 원한다. 인간은 다른 것들보다 오래 살아남기 위해 그것들을 죽이기를 원한다. 인간은 다른 것들이 자기보다 오래 살아남지 않도록 하기 위해 살아 있으려 한다."

 

사실 이 문단이 카네티의 모든 사상을 함축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살아남으려는 욕구에서 바로 권력이 발생하는 것이며, 죽은 자를 애도하기 위해 생겨난 것이 종교이며, 죽이지 않고 살아남는 길을 찾으려는 것이 카네티의 모험이다. 이러한 카네티의 인간관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그의 유명한 '웃음론'이다.

 

"어떤 사람이 쓰러질 경우, 그 장면은 우리 자신이 추적해서 쓰러뜨린 어떤 동물을 연상시킨다. 갑자기 쓰러져서 웃음을 유발하는 모든 사태는, 그것이 무방비 상태임을 드러내고, 또한 우리가 원하기만 한다면 쓰러진 것은 먹잇감으로도 취급될 수 있다는 사실을 연상시키는 데서 비롯한다. 만약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실제로 그것을 먹어버린다면 우리는 웃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먹는 대신에 웃는 것이다. 웃음은 우리들의 잠재적인 음식물을 놓쳐버리는 데 대한 우리들의 육체적인 반응이다."

 

** 군중 속의 인간

이러한 인간은 타인을 기피하게 된다. 타인은 자신의 경쟁자이고 언제 자신을 노리는 사냥꾼으로 변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사회가 부과하는 위계질서는 이러한 인간들을 서로서로 더욱 고립되도록 만든다. 하지만 계급, 신분, 부의 차이라는 불가침의 간격 속에서 개인은 불안을 느낀다.

 

"인간은 스스로가 만든 상호간의 간격 속에서 경직되고 음울해진다. 그는 이 간격이라는 질곡에 질질 끌려가기만 할 뿐 스스로 움직일 수 없다. 인간은 이것이 자승자박임을 잊어버린 채 이것으로부터 해방되기를 갈망한다. 그러나 어떻게 혼자 힘으로 자신을 자유롭게 할 수 있을까? 인간이 아무리 의지를 굳게 하고 다가서더라도 결국 자신이 자기의 노력을 방해하는 타인들 사이에 놓여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타인들이 간격을 고수하는 한, 인간은 그 타인들에게 가까이 갈 수 없다. 인간은 함께 모임으로써만 간격의 질곡에서 해방될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군중 속에서 일어난다."

 

결국 군중은 개인의 해방 창구로서 기능하는 것이며, 군중 속에서 개인은 진정한 평등, 일치감, 안전감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군중 속에서의 개개인의 차이의 소멸에 의한 자유의 획득을 가리켜 카네티는 방전(entladung)이라 불렀다(군중의 내부 메커니즘을 논하면서 그가 사용하는 용어는 간격, 밀도, 방전 등 다분히 자연과학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방전은 환상에 지나지 않기에, 군중은 운명적으로 해체될 수밖에 없다.

 

{군중과 권력}은 그 제목처럼 이원적인 구조를 하고 있다. 전반부가 군중의 다양한 형태를 분석하고 그 역학을 구명하는 부분이라면, 후반부는 그런 군중이 어떻게 권력에 길들여지고 복종하는가를 밝히는 부분이다. 카네티가 군중으로 간주하는 것에는 폭동이나 혁명의 순간의 파괴적인 전형적 군중에서부터 극장이나 경기장의 정체된 군중, 종교적 군중으로 대표되는 느린 군중 등 다양하다. 심지어 죽은 자, 악마, 천사와 같은 보이지 않는 군중, 미래의 후손이나 정자로까지 끝없이 확대된다.

 

** 관찰과 직관, 그리고 시적 상상력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카네티의 사유방식이다. 카네티의 서술은 비체계적이다. 그것은 관조적이고 현상학적이다. 어떤 가정이나 전제도 없이 단순한 관찰이나 정의에서 불현듯 시작한다. 손동작이나 앉거나 서는 자세, 먹는 행위, , 바다, 숲 등등 우리가 늘 일상생활에서 경험하는 구체적인 사실에서 출발한다. 그의 문장은 하나하나가 단절된 직관의 섬이다. 그것들이 점차 누적되면서 어느 순간 커다랗고 낯선 통찰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군중과 권력}을 읽은 사람이라면, 지휘자를 권력의 가장 뚜렷한 구현자로 보지 않을 수 없다.

 

관찰에서 통찰을 이끌어내는 그의 장기는 시적 상상력에 전적으로 빚지고 있다. {군중과 권력}이 이룩한 탁월한 성과 중 하나로 꼽히는 '군중 상징론''국민 상징론' 그리고 '명령과 가시의 비유'는 그의 이러한 문학가적 상상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리고 무수한 원시부족들의 신화와 설화를 재해석해내는 데도 그의 상상력은 빛을 발한다. 어떠한 기성의 사상체계나 개념에 의존함이 없이, 오직 독자적인 관찰과 직관만으로 그 누구도 이야기할 수 없었던 인간의 진실을 파헤치는 카네티의 통찰은 두렵기까지 하다.

 

[군중]의 장이 마치 한편의 서사시처럼 긴박하게 읽히는 것은 그것이 그의 직접적인 체험에서 연유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관찰에서 예기치 않은 통찰을 이끌어내는 이러한 그의 서술방식, 사유방식 때문이기도 하다.

 

** 군중 - 권력 - 죽음

"고양이는 쥐를 가지고 놀 때, 쥐를 얼마쯤 도망치게 버려두기도 하고 쥐에게서 등을 돌리기까지 한다. 그러나 쥐가 고양이의 권력의 테두리 안에 있다는 것에는 다를 바가 없다. 만일 쥐가 그 테두리를 뛰쳐나오면 고양이의 권력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잡힐 수 있는 한계를 벗어나기 전에는 그 권력의 테두리 안에 있는 것이다. 고양이가 지배하는 공간, 고양이가 쥐에게 허용하는 희망의 순간들, 그러나 잠시도 눈을 딴 데로 돌리지 않는 면밀한 감시와 해이해지지 않는 관심, 그리고 쥐를 죽이려는 생각. 이것을 모두 합친 것, 즉 공간, 희망, 빈틈없는 감시와 파괴적인 의도를 권력의 실체, 좀더 단순히 말해 권력 그 자체라고 부를 수 있다."

 

카네티가 폭력과 권력을 구분하며 사용한 유명한 '쥐와 고양이의 비유'이다. 고양이가 쥐를 죽이는 순간에 사용하는 것은 폭력이지만, 그 직전까지 죽음의 위협으로 쥐를 지배하는 것이 바로 권력이다.

 

권력은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인간의 살아남으려는 욕구에서 비롯한다. 따라서 그것은 필연적으로 죽음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 군중을 선동하기 위해 권력자가 내뱉고 모든 군중이 따라서 복창하는 'slogan'이라는 단어의 어원이 고대 켈트어 'sluagh-gairm'에서 유래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sluagh-gairm'귀신의 대군이 저지르는 함성'이라는 의미다. 죽은 자들과 군중, 선동자(권력자)가 삼위일체를 이룬다.

 

카이사르, 칭기즈칸, 나폴레옹, 히틀러……. 인간의 역사는 더 많은 군중을 죽음으로 내몬 자들을 숭상한다. 재능이 있는 동시에 사악한 인간은 결코 부족함이 없다. 그들은 모두 시체더미의 왕이다. 인간의 역사는 살아남는 자의 역사이고, 폭력의 역사이며, 시체더미의 역사이다. 권력자는 군중을 죽음으로 위협하여 전장으로 내몰고, 군중은 죽음의 군중, 곧 시체더미가 된다. 권력자는 그만이 살아남은 유일한 인간이 되어 시체의 들판에 서 있기를 좋아한다. 살아남는 최후의 인간이 되는 것, 이것이 모든 권력자가 원하는 것이다.

 

모든 군중은 결국 '추적 군중(타자의 죽음을 노리는 군중)'이거나 '도주 군중(타자의 죽음의 위협으로부터 달아나는 군중)' 두 가지 중 어느 하나일 수밖에 없다는 것, 그러나 죽음이야말로 가장 강한 권력자라는 것(왜냐하면 죽음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카네티의 절망이 있다. 군중과 권력의 본질을 죽음에서 유추해내고, 죽음을 삶의 일부로 간주하는 그의 관점은 죽은 아버지가 산 사람 이상의 생명력과 무게를 지니고 그를 지배했던 유년 시절의 체험과 무관하지 않다.

 

카네티는 인류 역사를 통틀어 과연 죽이지 않고 살아남는 방법은 없는지 살펴보았다. 그가 군중의 원형을 원시부족(통시적으로 그리고 공시적으로)'무리(Meute)'에서 찾고, 세계 곳곳의 신화와 전설을 뒤진 것은 이 때문이다. 현대의 스포츠 경기나 의회정치 등 몇몇 예외는 있었으나, 이는 어느 날 갑자기 미친 권력자의 입에서 터져나올 대량 살육의 명령에 비하면 극히 무력한 것이다(카네티는 문학적 불멸성만이 그러한 위험에서 자유롭다고 여겼다). 따라서 카네티의 관심은 권력자의 살아남으려는 미친 열정을 제어하는 것, 권력자의 명령으로부터 가시(권력자의 명령이 명령을 받는 자에게 남기는 억압적인 상처에 대한 카네티의 독특한 비유)를 제거하는 것과 같은 소극적인 대안의 모색으로 한정되었다.

 

** 애도 무리 혹은 종교-권력

"종교의 핵심은 언제나 똑같다. 그것은 애도이다. 사람들은 남을 박해하는 존재로서 살아왔고 계속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그들은 타인의 살을 추구한다. 그들은 더 약한 사람들을 괴롭힘으로써 먹고산다. 그러나 죄와 불안은 끊임없이 자라나고 부지불식간에 그들은 구원을 열망하게 된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을 위해 죽은 사람에게 자신들을 결부시키고, 그 사람을 애도하는 가운데 자기들이 박해를 받는 자라고 느낀다. 인간들이 무리들 안에서 살육을 그만 두지 않는 한, 애도의 종교는 인간의 영혼을 다스리기 위해서 불가결한 것이다."

 

죽은 자를 애도하기 위해 모인 애도 무리가 곧 모든 세계종교의 기원이다. 카네티의 종교관을 거칠게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권력은 전쟁(이것은 두 전투 무리가 대치하는 이중 군중이다)을 낳고, 전쟁은 죽음을 낳고, 죽음은 종교를 낳고, 종교는 다시 권력을 낳는다. 사냥 무리 혹은 전투 무리의 애도 무리로의 전화(轉化), 그리고 애도 무리의 전투 무리로의 전화는 끝이 없다.

 

종교란 처음에는 인간의 군중적 속성을 이용해(곧 한 사람의 신자라도 더 받아들이기 위해 열린 군중을 지향한다) 권력을 획득하지만, 군중의 와해를 막기 위해(이것은 군중의 운명이다) 저 세상의 약속으로 끊임없이 방전을 유예한다(그럼으로써 닫힌 군중이 된다). 삶이란 가시의 연속일 수밖에 없는데, 종교는 역전(가령 가난했던 자가 저 세상에서는 가장 높은 곳에 있다는 식의)을 통해 저 세상에서의 가시의 해방을 약속한다. 이렇게 군중을 길들임으로써 종교는 권력을 유지해왔던 것이다. 아니, 죽음에 대한 인간의 근원적인 두려움, 죽음의 위협을 이용한다는 점에서 종교와 권력은 하나다.

 

카네티가 쉬레버라는 편집증 환자의 병례를 면밀히 검토한 후 내리는 결론은 결국 종교와 정치는 불가분의 관계라는 것, '세계의 구세주''세계의 통치자'는 하나이며 같은 인물이라는 것, 그들의 유일한 욕구는 권력욕이며, 따라서 그들은 모두 편집광이라는 것이다. 예수는 자신의 죽음으로 살아남은 자들을 구원했지만, 종교는 죽음의 위협으로 모든 살아남은 자들 위에 군림한다. 이것이 카네티의 통렬한 종교 고발이다.

 

** 풀리지 않은 문제 - 증식과 변신

이상에서 살펴본 것은 {군중과 권력}이 담고 있는 몇 가지 주제에 불과하며, 이 외에도 아직 언급조차 하지 못한 많은 중요한 측면들이 존재한다. 이를 테면 살아남으려는 욕구 못지않게 카네티가 중요하게 본 것으로 '증식의 층동'이 있다. 군중의 한없이 불어나려는 증대의 욕구, 언제나 더 많은 권력을 소유하려는 팽창의 욕구, 오늘날 더욱 강력해진 생산과 소비의 끝없는 성장 욕구가 다 여기에서 비롯한다. 카네티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동일시하는 것도, 그들 체제를 이끌어가는 추동력이 이데올로기나 부의 소유와 분배 구조가 아니라 생산·증식·성장 지상주의로서 같기 때문이다.

 

카네티는 이러한 증식 충동이 저 옛날 원시시대 때부터 수적으로 열세였던 인간이 다수의 동물 무리들을 이겨내기 위해 기원하던 것에서 연유했다고 본다. 이러한 다수로의 증식 충동의 또 다른 측면이 바로 '변신'이다. 카네티는 토템이 그런 것처럼, 변신을 인간문명 진화의 힘으로 긍정한다. 그러나 변신의 대가인 권력자는 자신은 수시로 가면을 바꿔 쓰지만 타인의 가면은 악착같이 벗기려 하고, 아예 변신 자체를 금지하거나 박탈하려 한다.

 

모든 위대한 고전들이 그렇듯이, {군중과 권력}은 어떤 한 분야로 분류하기 어려운 책이다. 군중심리학 책으로도, 정치학 책으로도, 인류학 책으로도 읽힐 수 있다. 그저 잘 쓴 문학서로 읽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살아남음과 죽음, 인간에 대한 그의 필생의 성찰이 녹아 있는 이 책은 그가 문학적 전범(典範)으로 여겼던 스탕달의 바람처럼, 100년 후에도 수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