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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풍경 /정기용

혜공 2015. 2. 17. 14:13

 

 

 

 

 

출판사 서평

 

건축가 정기용은 직업적인 이유로 여행이 잦다. 그때마다 그는 연필과 만년필, 그리고 조그마한 스케치북을 습관처럼 지니고 다닌다. 그렇게 해서 쌓인 스케치북이 수십여 권, 스케치 작품 수로는 수천 점에 이른다. 『기억의 풍경: 정기용의 건축기행 스케치』는 건축가 정기용이 오랜 시간 세계 각지를 여행하면서 그린 스케치와 이에 관한 건축적 단상을 모은 책이다. 수십여 권의 방대한 스케치북에서 180여 점의 스케치를 엄선하여 수록한 이 건축기행 스케치 모음집은 건축과 여행이 우리에게 무엇일 수 있는지를 새로운 방식으로 환기시켜준다. 순식간에 손으로 포착한 스케치, 잠언과도 같은 메모 혹은 단상은 건축에 대한 발견에 그치지 않는다. 그 성긴 행간마다 삶에 대한 깊은 울림을 자아내는 것은 건축과 삶을 하나로 사유하는 정기용만의 독특한 건축철학이 있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여행, 풍경과 사물, 그리고 손으로 그리는 즐거움

 

여행에는 낯선 풍경, 사물, 이질적인 문화가 수반된다. 정기용은 그것들을 자신과는 별 관계없는, 낯설거나 이질적인 것으로 치부해버리거나 신기한 볼거리쯤으로 넘어가지 않는다. 그는 “여행이 주는 최고의 축복은 낯선 땅을 바라보는 것이다.”고 말한다. 그는 그 축복이 찰나적인 시선으로 흘러가도록 놔두지 않는다. 오랜 습관이기도 하지만, 그는 여행하면서 조우하게 되는 풍경, 건축, 사물 등을 거의 ‘무의식적인’ 시선으로 담아낸다. ‘무의식적’이라 함은 봄과 동시에 직관적으로 손이 그려내는 동시성을 말하기도 하지만, “자기 몸속 깊이 잠들어 있는 잠재력”의 발현을 뜻하기도 한다.

여행이 우리에게 존재론적인 발견의 계기를 부여하는 것처럼, 건축기행 스케치는 건축이 삶과 죽음, 자연과 문명, 시간과 공간 등 우리의 존재론적인 근거임을 새롭게 통찰하게 해준다. 정기용이 스케치를 소중히 여기고 그것을 축복처럼 즐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손으로 그리는 지극히 아날로그적인 행위가 가장 존재론적인 통찰 행위가 되고 있는 것이다. 『기억의 풍경』은 단순히 건축 혹은 건축기행에 관한 단상들에 머물지 않고, 세계와 자아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 발견, 그리고 놀라움에 대한 예찬인 것이다.

 

‘감응’의 순간을 포착한 스케치

 

정기용은 자신의 건축철학을 ‘감응’이라는 단어로 요약해서 설명한다. 건축은 땅을 살피고 사람을 만나고 시대의 기류를 읽는 과정에서 시작하며, 감응은 이런 일련의 과정이 인간의 근원적 질문과 결합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땅 위에 건물을 세우기 전에 정기용은 땅은 무엇이고 건물은 무엇인지 질문한다. 또한 그 안에서 살아갈 사람들이 누구인지 질문한다. 모든 건축은 삶과 죽음, 시간과 공간 같은 가장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문제와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기억의 풍경』에서 정기용은 이런 근원적 문제에 해당하는 여러 나라의 ‘풍토’와 ‘풍경’을 스케치한다. 그에 따르면 풍토는 그 지역의 기후, 역사, 문화가 결합되어 나타난 것으로 건축가들의 기술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기본 조건이다. 풍경 또한 결코 변하지 않는 것으로 개별 건축물은 모두 그 안으로 포섭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건축은 맥락에 대한 존중, 그것들과의 조화를 고려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고 건축의 내적 논리만을 따지면 자연과 무작정 대립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여러 평자의 지적대로 정기용 건축의 아름다움은 주변 맥락을 존중하려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이 책은 그러한 태도의 산물로서 그와 바깥세계가 서로 감응하는 순간을 보여준다.

 

자기 성찰의 도구로서의 스케치

 

정기용에게 스케치 작업은 단지 대상을 기록하는 것

에 그치지 않고 특정한 주제 아래 스케치를 분류하고 그 안에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까지 포함한다. 그에 따르면 이 과정은 “스케치를 각본에 의해 다시 그리는 행위”이며 이를 통해 “내 시선이 포착하는 것들에 대한 이유나 근거를 추적”할 수 있다. 『기억의 풍경』은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드러내는 ‘시선의 원형’에 대한 이러한 탐색의 결과물로서, 건축가 이전에 자연인 정기용이 어떠한 풍경과 사물에 영향받아왔고 그 안에서 어떠한 문제와 주제에 천착했는지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 정기용의 스케치 작업은 대상으로서의 풍경과 사물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과 태도를 강조한다. 그는 스케치는 “대상을 타자화”하는 행위라고 지적하면서, 대상을 잘 그리는 것에 얽매이지 말고 그 행위를 통해 드러나는 나 자신의 내면세계에 주목하라고 조언한다. 스케치는 “우리가 볼 수 없는 우리 자신의 뒷모습”이며, 그 목적은 “자기 몸속에 깊이 잠들어 있는 잠재력을 발견”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기억의 풍경』은 이러한 정기용 특유의 스케치 관(觀)이 돋보이는 책으로 그의 내면세계와 작업동기를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정기용 건축철학의 에센스를 담은 스케치

 

정기용의 스케치는 소박하고 평범해 보인다. 손가락 끝에 힘을 주어 꾹꾹 눌러 썼는지 어딘가 묵직하고 강건한 느낌을 준다. 이는 이 책에 실린 스케치가 대부분 강과 산, 집이라는 사실에서 비롯된 것인지 모른다. 그가 “내 시선의 원형을 이루는 것”이라고 밝힌 이 대상들은 바르트가 말하는 ‘푼크툼’, 즉 개인에게 상처처럼 와서 박히는 것들이다. 그가 말하는―젊은 건축가들에게 전하려는―“손으로 그리는 기쁨”은 이러한 내밀한 경험까지 포괄하는 것으로 이는 『기억의 풍경』을 아름답고 화려한 여타 스케치북과 구별 짓는 중요한 요인이다.

2008년에 출간된 『사람 건축 도시』『서울 이야기』『감응의 건축』이 한국건축계에서 보기 드문 ‘사회적 건축가’로서의 정기용을 소개하는 데 집중했다면, 『기억의 풍경』은 그러한 모습의 이면에 담긴 정기용 개인의 존재론적 물음과 지향을 드러낸다. 물론 그 두 모습은, 그의 작품 주제를 집약해 놓은 듯한 각 장의 제목을 보면 짐작할 수 있듯이, 서로 분리되지 않은 채 단단히 엉켜 있다. 모든 스케치에는 전쟁과 폭력으로 점철된 현대사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으며, 동시에 자연을 파괴하고 상생을 거부하는 근대 건축에 대한 비판적 시선이 배어 있다. 이 책은 이러한 삶의 배경과 현실 인식 속에서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펼쳐 보인 한 건축가의 고유한 정신적 풍경을 보여준다.

 

 

 


 

 

저자소개 정기용

 

1971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및 서울대학교 대학원 공예과를 졸업하고 1972년 프랑스정부초청장학생으로 1975년 프랑스 파리장식미술학교 실내건축과, 1978년 프랑스 파리 제6대학 건축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정부공인 건축사자격을 취득하고 다시 1982년 프랑스 제8대학 도시계획과를 졸업했다. 1975~85년 프랑스 파리 소재 건축 및 인테리어 사무실을 운영했으며 1986년 기용건축을 설립했다. 2004년 베니스비엔날레 국제건축전 한국관 커미셔너로 활동했다. 현재 성균관대 건축과 석좌교수, 문화재 위원으로 있었으며, 도시건축집단 ubac에서 작업하고 있다. 프랑스 노동성 주관 ANACT(노동환경개선 설계경기) 3위 입상(1982), 제3회 교보환경문화상, 한국건축가협회 특별상(2000), 서귀포건축상, 제주시건축상, 순천시건축상, 한국건축가협회 우수상(2004)을 수상했으며, 주요 작품으로는 계원조형예술대학(1990), 동숭동 무애빌딩(1993), 청계동 주택(1995), 진주 동명중고등학교(1996), 서울예전 드라마센터 리노베이션(1996), 무주공공프로젝트(무주군청, 공설운동장, 무주시장, 면사무소 4개소 등 다수, 1997~2006), 영월 구인헌, 춘천 자두나무집(2000), 어린이 도서관(순천, 제주, 서귀포, 진해, 정읍, 김해), 코리아나아트센터(2003), 무주곤충박물관, 파주 은하출판사, 파주 열림원(2006) 등이 있으며 최근 노무현 대통령 봉화마을 사저와 추모의 집을 설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