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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내지 않고 핀란드까지 /박정석

혜공 2015. 2. 16. 09:56

 

 

책소개

럽의 끝과 끝을 달리며 깨닫는 진정한 여행의 의미
모든 게 서툴렀던 스무 살의 배낭여행 이후 바닷가 마을에서 지나치게 평온한 나날을 보내던 여행가 박정석이 지금까지와는 또 다른 여행을 위해 다시 북유럽으로 떠났다.『화내지 않고 핀란드까지』는 터키를 시작으로 불가리아, 루마니아, 폴란드, 발트3국, 핀란드를 육로로 이동하는 여정을 담고 있다. 유럽의 끝에서 끝으로 이어지는 여행길에서 터지는 사건 사고들이 다이내믹하게 그려진다. 터키에서 핀란드를 거치며 벌어지는 수많은 에피소드는 세상은 넓고 아름다우며, 내일을 기대하며 살아갈 가치가 충분하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한다.

북유럽, 그중에서도 특히 핀란드는 고요하고 한적하지만 상대적으로 가장 덜 알려진 편에 속했다. 이 책은 그동안의 핀란드 경쟁력에 관한 책들과는 달리, 한 여행자의 눈으로 본 핀란드의 풍경을 진솔하게 그려낸 것이 특징이다. 사진만으로는 온전히 표현할 수 없는 핀란드 특유의 아름다움이 저자의 감칠맛 나는 묘사로 사실적이고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저자소개

 

자 박정석은 이화여자대학교, 노스웨스턴대학교, 플로리다대학교에서 영화학과 저널리즘을 전공했다. 동해안 시골에 직접 집을 짓고 얌전한 시바견을 키우며 살고 있다. 그 개의 이름은 사요리. 날렵한 자태가 학꽁치를 닮아 그렇게 부른다. 개와 닭들 수발드느라 긴 여행은 가기 어렵게 되었다고. 지은 책으로 <쉬 트래블스> <33번째 남자> <용을 찾아서> <내 지도의 열두 방향> <하우스> <바닷가의 모든 날들>이 있다.

 
책 속으로 추가

줄리안은 전형적인 스위스 인이다. 몇 개 언어를 구사할 수 있고, 지구 환경을 걱정하고, 조국에 대한 자부심이 매우 강하다. 그가 살고 있는 취리히는 살기 좋은 도시를 뽑는 조사에서 항상 세계 3위 안에 든다고 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전 유럽에서, 아니 이 세상에 그보다 더 좋은 주거 지역은 없다고 했다. 부모를 절대적으로 존경하는 착한 어린아이의 표정으로 그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정말, 세계에서 최고로 멋진 곳이야.”
그의 취미는 독서와 여행, 스노보딩이다. 박물관과 미술관, 발레 공연에 가는 것을 좋아한다. 비트겐슈타인의 책을 열심히 읽지만 스티브 잡스가 누군지는 알지 못한다. 하루에 다섯 번쯤 챕스틱을 고쳐 바르고 햇볕을 많이 쬔 날에는 반드시 팩을 하고 나서야 잠자리에 든다. 건강에 나쁘다는 이유로 하얀 빵 대신 반드시 호밀 빵을 먹는다. 케이크를 사랑하고 맥주를 혐오한다.
나는 줄리안처럼 섬세하거나 예민하지 않다. 과학자가 되려고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미술관이나 박물관은 1년에 한 번도 가지 않는다. 발레? 내 돈 주고 보는 일은 앞으로도 없을 것 같다. 팔자로 걷고, 맥주와 닭튀김, 야구 중계 시청을 좋아한다. 환경이 중요하다고 생각은 하지만 티백 하나를 분리수거하기 위해 4개의 쓰레기통-차 찌꺼기, 종이, 실, 금속-을 필요로 하는 독일식 방식은 좀 지나치다고 느낀다.
“이런 게 바로 여행이지!”
줄리안의 말이 맞다. 여행이 아니었더라면 우리가 동행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중략)
우리 두 사람의 공통점이라면 여자보다는 남자를 더 좋아한다는 것 정도다. 그렇게 닮은 데가 없는 두 사람이, 거의 정반대라고 할 수 있는 특징을 가진 두 존재가, 비행기로 열 몇 시간 떨어진 곳에 각각 태어나 서로 아무 상관 없이 어른이 된 우리가, 폴란드의 고도 크라쿠프에서 다시 만나 1000년 된 성 앞 푸른 풀밭에서 스스로의 것과는 너무나 다르게 생긴 얼굴을 들여다보며 오직 호의로만 가득 찬 대화를 나누고 있다니, 경이로웠다. 100년 전이라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을 텐데.

이것이야말로 문명의 발전이 가져온 가장 좋은 일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p.177-178

단조로운 숲길이 이어지더니 푸른 들판이 펼쳐진다. 풀을 뜯는 갈색 말들, 지붕이 빨간 나무집들, 하얀 펜스. 그림책에나 나올 법한 평화로운 시골 풍경이다.
보이지 않는 것은 사람뿐이다. 어디에도, 아무도 없다. 이 거대한 초원 자체가 무인 시스템으로 운영되고 있는 것처럼.
“어디 적당한 곳에 차를 좀 세워 봐.”
운전하는 둘리틀에게 말했다. 이런 시골에 공중 화장실이 있을 리 없다.
온통 허허벌판이다. 드넓은 들판에 사람은 없다. 은밀하게 일을 보기에 적당한 환경이다. 덤불과 나무들로 아늑하게 그늘진 천연의 화장실이 어디쯤 있을까.
“뭐해? 빨리 아무 데나 으슥한 곳에 차를 좀 세워보라니까. 더 이상 못 참겠어.”
“세우기가 힘들어!”
핀란드에서 운전하는 또 다른 어려움은 갓길의 부재다. 어찌 된 일일까. 잠깐 세울 만한 곳이 눈에 띄지 않았다. 한적한 길이지만 세울 곳을 찾기 위해 속도를 줄이다 보면 뒤에서 귀신처럼 다른 차가 나타났다. 아니면 버스정류장임을 알리는 표지가 세워져 있거나.
“지나다니는 사람 한 명 없는데, 설마 버스가 그렇게 쉽게 오겠어? 1시간에 1대쯤 다니는 버스일 거야. 급하다. 저기 정류장 표시 있는 곳에 그냥 세워 봐!”
내 말대로 둘리틀이 차를 세우려는 순간, 마술처럼 백미러에 버스가 1대 나타났다. 급히 액셀을 밟아 그곳을 떠날 수밖에.
“인적 없는 시골인데 잠깐 일을 볼 만한 곳을 하나도 찾을 수가 없다니, 세상에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더욱 놀라운 것은 모처럼 샛길이 눈에 띄어 들어가 보면 덤불 너머에 아담한 오두막이나 주택이 초소처럼 세워져 있었다. 신비롭다. 바깥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데 들어가 보면 여지없이 인가가 있다. 이것이 바로 핀란드의 집짓는 방식이다.
“하나 더 가서, 그래, 저 길, 저 길로 들어가 봐! 어서!”
“하지만 집이 있는데? 저쪽에, 농장 같은 집이 있어.”
“더 이상 못 참겠어. 농장이 있든 아파트가 있든, 이젠 못 참겠다고. 어서 들어가!”
어느 덤불 옆 샛길 가장자리에 마침내 차를 세웠다. 농장은 약 100m 이상 떨어져 있었다. 이런 거리에서 육안으로 뭔가를 식별하기란 불가능하다. 봐도 할 수 없다. 사정이 급해진 나는 총알처럼 덤불로 뛰어들었다.
“야, 야! 트럭 들어온다!”
단 몇 초도 마음 놓을 틈을 안 주는 동네였다. 둘리틀의 다급한 고함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곧 자욱한 흙먼지를 일으키며 거대한 덤프트럭이 좁은 길을 비집고 들어왔다. 완벽한 타이밍이다. 나는 바지춤을 움켜쥔 채 덤불 속으로 넙죽 엎드렸고 둘리틀이 팔을 쩍 벌린 채 내 앞을 막아섰다.
덤프트럭 운전사는 창문 너머로 고개를 내밀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내 우리를 지나쳐 농장으로 향했다.
“진짜, 지독한 나라로구만.”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탄식한 말이다.
노상방뇨 한 번 마음 놓고 못하는 곳이라니, 만만치 않다. 순찰 도는 경찰이나 경고 표지판 하나 없는데도 은밀한 욕구를 해결할 주인 없는 땅 한 조각 찾기 힘든 광활한 벌판이여.
핀란드의 인구는 겨우 500만 명이지만 그들이 이 나라에서 각각 둥지를 틀고 앉은 위치와 방식은 너무나도 절묘해 설령 서로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한 명은 다른 한 명으로부터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핀들은 적은 인원으로 큰 땅을 사수하는 방법에 도통한 민족이다. 나머지들과 너무 멀리 떨어지면 언젠가는 바깥으로 통 튕겨 나가 다시는 궤도에 진입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
당신이 혼자라고?
음.
핀란드에서, 그것은 아마 착각일 가능성이 높다.
p.308-309

핀란드적인 마을이다. 더 적당하게 설명할 길이 없다. 예쁘고, 한적하고, 커피냄새처럼 고요함이 떠돌았다. 소리가 없이 산뜻한 색채만 환히 빛나는, 세상의 근심걱정 바깥에 놓인 듯 태풍이 아무리 세차게 몰아쳐도 나뭇잎 하나 까딱하지 않을 듯한 그곳.
핀란드의 마을이 다른 유럽의 마을들과 구별되는 미학적 특징들은 너무나 미묘해, 그러니까 공기의 결, 햇살의 바삭거리는 정도, 건물들을 칠한 페인트의 채도처럼 아주 소소한 것들이라 그날 날씨가 어떠했는가, 몇 시에 방문했는가, 바로 직전에 들린 목적지가 어디였는가 등에 따라 쉽게 변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섬세한 아름다움이다. 마치 온도나 냄새처럼, 현장에서 그 존재를 선명하게 느낄 수는 있지만 말과 글로 설명하기는 어려운 개성.
과묵한 핀들은 세상의 북쪽 끝 은밀한 곳에 이렇게 어여쁜 마을들을 차려놓고 외부에는 절대 소문내지 않은 채 자기들끼리만 재미보고 있었던 것이다.
“모르는 게 더 나았을까? 세상에는 이런 곳도 있다는 것을?” “글쎄. 사람 사는 곳이 다 비슷하지 뭐. 여기서 살려면 아마 엄청나게 돈이 들 거야. 집세도 그렇고 생활비도 그렇고, 뭐든 아주 비쌀걸.”
“맞아. 그리고 평화로운 것도 하루이틀이지, 계속해서 살면 심심할 걸. 100년이 지나도 옆집 사람 늙어죽는 것 말고는 어떤 사건도 벌어지지 않을 것 같아.”
신포도가 맛없다고 주장하는 여우들처럼, 우리는 이런 말을 주고받았다.
하얀 건물들이 많아서일까. 워낙 거리가 깨끗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극도로 쾌청한 날씨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포르보는 아주 하얗게 느껴졌다. 가로수의 초록빛 잎사귀에 노랗고 바삭한 햇살이 부딪혀 반짝거렸다.
그동안 우리 인생에서 이렇게 아름답다고 느낀 날들이 며칠이나 있었을까. 사실 많았지만 제대로 느끼지 못한 것뿐일까. 숲의 모습을 보기 위해서는 숲을 빠져나와야만 하는 것처럼, 행복했던 날들로부터 이렇게 멀어진 후에야, 너무 아득하게 지나와 후회조차 의미를 잃게 되는 시간이 되고서야 그때 그 순간이 얼마나 괜찮았는지 깨닫게 되는 것일까.
먼 미래가 아니라 바로 지금, 나를 스치자마자 과거로 변해 버리는 이 순간의 모든 것들을 충분히 맛보고 싶었다.
우리가 서 있는 곳은 핀란드의 포르보였다. 1346년 생겨난 포르보강 기슭의 작은 마을. 이곳의 상징이기도 한 검은 지붕의 빨간 목조 주택들이 강가를 따라 늘어서 있다. 발길 닿는 대로 거닐어 봤다.
마지막으로 맑은 공기를 한껏 들이마셨다. 부르릉, 차에 시동을 걸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부랴부랴 그곳을 떠났다.

누가 보면 이 어여쁜 마을에 일말의 미련도 없는 사람들처럼.
p.318-319

둥근 식탁에 촛불을 켜고 마주앉았다.
“어쩐지 기도라도 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긴데.”
무신론자에게도 종교적인 경외심이 밀려드는 순간이 있다. 지금이다. 무릎이라도 꿇고 싶어지는 순간. 일용할 양식에 감사하고, 선물처럼 주어진 와인 한 병에 감사하고, 지금 여기 핀란드의 호숫가 오두막에 있는 것을 감사한다. 살아 있음이, 바로 이 순간이, 나를 둘러싼 모든 사물이 경건하게 느껴진다.
전부 소중하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태양의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지만 아직도 빛으로 가득 차 어둡지 않은 하늘, 그 아래 거울처럼 고요히 놓여 있는 호수, 통나무집에서 풍기는 삼나무 냄새에 달착지근한 토마토소스 냄새가 섞여들어 훈훈한 공기, 벽난로에서 타닥거리며 장작이 타들어가는 소리.
바로 앞에는 내가 만든 저녁밥이 놓여있고 옆에는 둘리틀이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
우연과 의지가 합쳐져 멀고 먼 북유럽, 어린 시절 동화에서 ‘수오미’라고 읽은 곳에 진짜로 와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그때에는 집을 떠나는 것이 두렵기만 했는데 이제 이런 이국에서 내 집인 양 편안히 앉아 따뜻한 음식을 먹으려 하다니. 감사 기도를 하고 싶다. 누구에게라도.
목소리마저 낮추게 된다. 오랫동안 나를 가두고 있던 시공간, 그곳에서 완벽하게 빠져나왔다는 안도감 때문에. 자칫 뭔가 하나 톡 쳐서 와장창 깨뜨렸다가는 이 모든 좋은 것들이 한순간 연기처럼 사라지고 눈 깜박할 사이에 도로 본래 있던 장소로 돌아가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돌아가기 전까지 아직 시간이 남아 있다.
자정이 가까워져서야 힘센 무언가가 뒤에서 억지로 잡아끌기라도 하듯 하늘 저편으로 푸른 빛이 사라져 갔다. 몇 시간 가지 않아 다시 해가 떠오를 것이다.
자작나무 장작으로 불을 지펴 사우나를 한 후 선선한 바람 불어오는 호숫가에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
p.345-346

한국으로 돌아온 지도 한참 시간이 지났다.
핀란드가 간절하게 그립거나 한 것은 아니다. 수오미는 그렇게 강렬한 매력을 발산하는 나라가 아니다.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탈리아처럼, 타히티처럼, 뉴욕처럼, 도쿄처럼, 붉고 뜨겁고 왁자지껄하고 번쩍거리고 매끈하고 여러모로 끝내주는 그런 곳들과는 거리가 멀다.
핀란드는 지구의 북쪽 끝에 있다. 춥고 매우 조용하다. 여태 추우면서 조용하지 않은 곳을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나.
그 나라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것은 가이드북에 나와 있지 않은 소소한 것들, 설명하고 싶지만 불가능한 것들, 직접 가서 보지 않고서는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미묘한 몇 가지다. 글이나 사진이 아니라 오직 스스로의 눈과 귀, 피부를 통해서만 느낄 수 있는 특징들.
바싹 말라 보기보다 아주 쉽게 불이 붙고 놀랄 만큼 화력이 세던 자작나무 장작.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푸른 빛은 물론 잔잔한 정도 또한 하늘과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비슷하던 호수와 물풀, 들꽃, 덤불.
하늘을 향해 똑바로 뻗은 채 가느다란 가지에 앙증맞은 초록 잎사귀를 가득 달고 있던 하얀 숲.
평화 속에 어쩐지 우울함이 느껴지는 도시의 인적 드문 거리.
언제 들어가도 붐비는 일이 절대 없던 슈퍼마켓.
한밤중에도 파르스름하게 빛나던 청색 하늘.
아무리 어려운 질문이라고 해도 술술 대답할 준비를 마친 듯 환하게 웃으면서 다가오던 젊은이들.
그리고 우리는 아직도,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의 북쪽에서 날아들 메일 한 통, 조금 낯선
형상과 배열의 알파벳으로 발신인이 찍혀 있을 그 희고 바삭한 편지봉투를 기다리는 중이다.

첫눈 소식처럼 반갑지는 않을지라도.
출판사 서평
유럽의 끝과 끝. 터키에서 발칸, 발틱을 거쳐 고요한 핀란드 호수의 오두막에 묵기까지. 절대 화내지 말고 갈 것. 스무 살 때와는 정반대로 행동할 것. 어떻게든 그렇게 할 것. 동해안 바닷가 마을의 유순한 정착민이 된 전직 여행가, 다시 여행을 결심하다. 유럽의 끝 터키에서 또다른 끝 핀란드까지. 2300km의 오버랜드(overland) 모든 게 서툴렀던 스무 살의 배낭여행이 또렷하게 되살아나는 낯선 길에서, 그땐 미처 알 수 없었던 여행의 의미들이 성큼 와 닿는다. 스무 살의 여행은 빠르고, ...

 

출판사서평

 

유럽의 끝과 끝. 터키에서 발칸, 발틱을 거쳐 고요한 핀란드 호수의 오두막에 묵기까지. 절대 화내지 말고 갈 것. 스무 살 때와는 정반대로 행동할 것. 어떻게든 그렇게 할 것. 동해안 바닷가 마을의 유순한 정착민이 된 전직 여행가, 다시 여행을 결심하다. 유럽의 끝 터키에서 또다른 끝 핀란드까지. 2300km의 오버랜드(overland)
모든 게 서툴렀던 스무 살의 배낭여행이 또렷하게 되살아나는 낯선 길에서, 그땐 미처 알 수 없었던 여행의 의미들이 성큼 와 닿는다.

스무 살의 여행은 빠르고, 터프하고, 거침없었다. 꼭 가봐야 할 명소들과 가이드북에 명기된 ‘Must List’를 먹어치우듯 여행했다. 짧은 시간 안에 더 많은 것을 보고 경험하려는 전투적인 여행이었다. 그렇게 세상 구경은 할 만큼 하고 바닷가 마을에서 지나치게 평온한-흡사 식물과 같은- 나날을 보내던 전직 여행가, 문득 다시 떠나야겠다고 마음먹는다. 우연히 머리를 스친 핀란드. 가 보지도 못했고, 비싸고, 춥고, 빈틈없어서 쉬 마음이 가지 않는 그곳은 필연적인 선택이었다. 이번 여행은 편견을 극복하고 취향의 스펙트럼을 넓히는 여행, 나의 끝에 닿는 여행, 지금까지와는 다른 여행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여행의 시작은 핀란드와 대척점에 있는 터키다. 터키, 불가리아, 루마니아, 폴란드, 발트3국, 핀란드를 육로로 이동하는 여정을 결심한다. 불편하고 피곤하고 지치는 그 길에서 명심할 한 가지. 절대, 화내지 말 것.

첫 여행을 꿈꾸는 이에게 전하는 담백한 조언
떠나보면 공감하게 될 진솔한 여행자의 고백

 


불확실한 여행자의 하루하루는 동해안에서 겪었던 식물화현상을 말끔히 해소시킬 만큼 다이내믹하다. 유럽의 끝에서 끝으로 이어지는, 한번에 입으로 읊기에도 버거운 여행길에서 오늘의 사건 사고가 연방 터진다. 도미토리에서 불편한 잠자리, 한밤 중 낯선 기차역에 대면하게 되는 집시 무리, 제3세계에서 어김없이 닥치는 강도 사건, 길에서 만난 즐거운(gay) 여행자와의 동행…. 바랐던 것처럼 터프한 여행이 이어지지만 이국적인 배경, 수천 km에 달하는 고단한 여정, 특이한 경험을 밀어내고 이야기의 중심에 있는 건, 문득 떠오르는 그 옛날 배낭여행의 기억이다. 길 가는 행인에게 말 거는 것조차 낯설고 부끄럽고 서툴러서 친구와 가위바위보를 했던 기억,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른 채 밤기차에서 몸을 웅크렸던 숱한 시간들, 침대 하나를 간신히 빌려 낯선 여행자의 코 고는 소리에 아랑곳 않고 잠을 청했던 밤…. 그때의 서툰 여행자는 길 위에서 능숙해졌고, 다시금 맞닥뜨린 여행의 순간에 당황하지 않는다. 대신, 진솔하고 담담하게 그땐 미처 몰랐던 여행의 의미를 되짚는다.

여정의 하이라이트
핀란드!

 


터키에서 시작해 국경을 넘을 때마다 풍광이, 사람들이, 동행이, 여행을 마주하는 저자의 태도가 조금씩 변해간다. 그 변화는 정점은 여행의 하이라이트, 핀란드에서다. 아름답고 매력적이지만 비슷비슷한 유럽의 도시들을 거치며 감동의 강도는 점차 낮아졌고 신비로운 핀란드만을 고대하며 발트 3국까지 속도감 있게 해치웠다. 드디어 닿게 된 핀란드. 이 거친 로드트립을 가능하게 한 단어 핀란드. 한밤중에도 파르스름한 백야, 오직 나만를 위한 완벽하고 비밀스런 호숫가 오두막, 극도의 고요함 속에 느껴지는 바람과 햇살의 감촉. 손에 닿으면 깨질까봐 누군가 깊숙이 숨겨놓은 것 같은 핀란드 특유의 아름다움이 작가의 감칠맛 나는 묘사로 사실적이고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지금껏 이토록 세밀한 핀란드 박물지는 없었다. 사진으론 온전히 표현할 수 없는 핀란드의 미묘한 아름다움을 오직 글의 힘으로만 구현해낸다.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여행를 관조하던 작가는 핀란드에 이르러 이 신비로운 곳에 흠뻑 빠진 모습을 유감없이 드러낸다. 너무나 멀고 비현실적이라 과연 실존할까 싶은 북유럽, 그 중에서도 가장 오묘한 나라 핀란드를 단숨에 독자의 눈앞에 가져다주는 탁월할 능력을 발휘한다.

세상의 끝, 나의 끝에 닿는 여행

 


여행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와서 그 시간을 돌이켜본다. 도둑을 맞든, 동행과 싸웠든, 기대보다 별로였든, 돌아와서 생각하면 좋지 않은 여행은 없다.
처음 본 여학생들에게 삼계탕을 해주는 일, 식당에 홀로 앉은 여행자에게 말을 건네는 일, 그 여행자와 팔짱을 끼고 구시가 광장을 걸어 다니는 일, 헤어질 때 힘껏 끌어안은 일, 15년을 돌고 돌아 너절한 도미토리에 선 나를 발견한 일, 살아있음에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싶을 만큼 경건한 저녁식사.
터키에서 핀란드까지의 수많은 에피소드 조각을 모으다보면 깨닫게 되는 한 가지 자명한 사실. 세상의 넓고, 아름답고, 내일을 기대하며 살아갈 가치가 충분한 곳이라는 거다. 화를 꾹 참아야 하는 순간보다 완전한 행복과 아름다움에 취하는 순간이 또렷히 기억에 남는 게 여행이다.